“다만, 당신의 눈동자를 잠깐만 멈춰주십시요.” 이름 : 박노해 ( ) 날짜 : 2005-12-21 오후 11:09:00 조회 : 2246      “다만, 당신의 눈동자를 잠깐만 멈춰주십시요.”      - 박노해 시인, 강연을 마치면서        지금 쿠르드 땅에서는 다시 터키군의 잔인한 학살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터키 언론 보도만 봐도  날마다 3~5 명의 쿠르드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동의 집시’로 낯선 거리를 떠돌며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쿠르드인들은  우리에게 돈을 달라고, 무기를 달라고, 편을 들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을 지켜봐 주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없이 부르짖을 뿐입니다.  미국도, 서구도, 이슬람도 외면하고 있는 자신들의 절망과 슬픔과 진실 앞에  당신의 눈동자를 잠깐만 멈춰주고  당신의 귀를 잠깐만 기울여 달라고  이렇게 벙어리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구 마을에 국경이 없고 강제추방이 없고  군인이 없고 총성이 없는 세계를 함께 만들어  가자고 저렇게 처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일제 식민지배를 수많은 희생을 통해 독립을 했고, 해방 전후와 6.25전쟁에서 300만 명의 죽음과, 군사독재 시절의 학살과 희생 등 이미 치뤄야 할 것을 다 치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 힘으로 얻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즐기자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쿠르드는 우리의 과거가 아닙니다. 가난하고 고통에 울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 미래의 거울입니다. 그 ‘사람들의 거울’ 앞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가에 따라 우리 삶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작은제국주의로 나갈 것인지, 생명 평화 나눔의 삶으로 나갈 것인지.  흔히 말하는 동북아 ‘중심’국가. 그것의 기본적인 발상은 작은 제국주의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그 증표가 자이툰 부대 파병일 것입니다. 우리는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타협하고, 인간성보다는 국익을 우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칼은 갈아놓으면 쓰게 마련입니다. 60만 대군과 무기 양산체계, 이런 것들이 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한국은 이제까지 누구를 침략한 적도 없고, 베트남 용병참전과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 말고는 다른 나라에 크게 죄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도덕성이고 자부심이었습니다. 제가 세계의 가난한 지역과 분쟁현장을 다니며 평화활동을 하다 보면 그곳 사람들은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 중국인 등을 어디선가는 거부합니다. 그들은 제국주의 나라거나 그런 권력 위에서 오늘의 부국강병을 이룬 역사적 원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리아의 아무 힘도 없고 직책도, 기자증도 하나 없는 저는 어느 나라를 가나 환영 받고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 선조들과 우리세대가 너무나 힘들게 당해왔지만, 누구를 침략하고 수탈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지구시대에 우리가 물려받은 최고의 유산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우리 코리아가 쿠르드나 팔레스타인, 아체와 같은 가난과 억압 받는 인류의 고통 앞에 눈을 감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작은 제국주의’로 치달리고 말것입니다.    나는 쿠르드 만이 아니라 터키 또한 사랑합니다.  터키가 오랜 군부독재를 벗어나 민주화가 되기 위해서도 쿠르드인은 자기 나라 말과 글과 문화를 되찾고 자유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터키 군부는 사실상 '쿠르드 전쟁 비즈니스'로 막대한 성역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착한 터키민중의 노동과 창의력과 아이들의 꿈과 미래를 쿠르드 게릴라(PKK)소탕이라는 명분으로 탕진하고, 전 사회적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를 지속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쿠르드인들의 전망과 슬픔을 공유하는 것은 터키의 민주화와 중앙아시아 평화를 앞당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구시대의 성숙한 인간성은 국경 안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경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만년설이 덮힌 자그로스 산맥을 달리는 어린 소녀 게릴라들의 굶주림과  동상 걸려 잘린 손가락으로 든 ‘영혼의 총’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눈동자에 어린 자유의 꿈과 눈물 방울을 생각합니다.    그 눈물어린 쿠르드인의 눈동자에, 다만 당신의 눈동자를 잠깐만 멈춰주십시오.  "다흐 기비들!"  "힘든 일을 만나면 언제나 산을 바라본다!"  다들 힘들때, 여러분의 선한 마음에 고통을 드려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