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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진중권 ( ) |
날짜 : 2004-11-04 오후 11:47:50 |
조회 : 2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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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쓰면 개그가 된다”
요즘 조선일보를 보면 온통 ‘원한’(ressentiment)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이다. 대체 무슨 일을 당했기에 저토록 원한이 사무쳤을까?
“우리가 쓰면 여론이 된다”면서 여유를 부리던 게 불과 몇 년 전, “너희가 쓰면 개그가 된다”고 보는 게 요즘 분위기다. 그래서일까? 최근 여유를 잃어버리고 온통 ‘원한’에 가득 찬 소모적인 악담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철학자 니체는 “원한”을 ‘노예의 도덕’의 특성으로 들었다.
정부에 악담이나 늘어놓는 것이야, 그들이 늘 하던 짓이니 새로울 게 없다. 개는 짖기 마련이 아닌가. 하지만 지난 대선과 총선과 패배 이후 개 짖는 소리가 달라졌다.
최근 조선일보의 어조는 어떤 급박감이 느껴질 정도로 과격해지고 있다. 과격한 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도를 넘어선 과격함은 차라리 우스꽝스러움이 된다. 최근 조선일보가 그런 모습이다.
조선일보의 트레이드마크 김대중 칼럼은 오래 전에 맛이 갔다. 전성기엔 보수층의 정치적 본능을 읽어내는 감각으로 그들의 정치적 성감대를 슬쩍 건드려 발기시키는 섹시한 맛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안 서는 물건을 억지로 세우기 위해 무리하게 두 손으로 마구 문질러댄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어디 발기가 되겠는가? 게다가 이미 한국의 꼴 보수층의 몸도 예전 같지 않아, 정치적 발기부전증에 빠진 상태가 아닌가.
조선일보의 변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류근일 칼럼. 과거의 류근일은 그 바닥에서는 나름대로 격조를 유지하려 애쓰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최근에 그의 글들은 조갑제의 것과 전혀 구별이 안 된다.
과거의 조선일보는 꼴통 같은 소리는 주로 월간조선으로 보내놓고, 자기들은 명색만은 그래도 메이저 언론이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조선일보의 지면은 정확히 월간조선 수준이다. 가령 다음 글을 보라.
“총소리만 없는 백병전의 이쪽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명색이 야당이라는 한나라당은 목숨을 던질 생각도, 싸움의 노하우도, 자기 정체성도 없는 기회주의 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래서 절실한 것은 한나라당 같은 것 말고, 저 널뛰는 세력을 저지할 ‘낙동강 교두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충무공의 ‘아직 남아 있는 전함 12척’ 같은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전 국토를 내주고 낙동강까지 밀린 상황. 모든 전함이 수몰되고 달랑 12척만 남은 상황. 이 얼마나 급박하고, 긴박하고, 절박한 상황인가. 바로 이것이 요즘 조선일보가 느끼는 위기의식의 수준이다.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기대를 걸 것인가? “한나라당 같은 것”은 아니다. “자기 정체성도 없는 기회주의 집단”에게 뭘 기대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그는 삐리삐리삐릿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우리는 그 절박한 소망을 애국 기독교계와, 이제는 생각이 바뀐 ‘자유주의 386’, 아니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자유주의 486’ 세대에 한번 걸어보려 한다.”
“절박한 소망.” 이 얼마나 애절하고, 애잔하고, 애상적인가. 그런데 그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낸 파랑새의 정체가 무엇인가? “애국 기독교계”란다.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조국을 건질 영웅이, 세상에, 애국 집사, 호국 권사, 안보 장로, 반공 목사님이란다. 할렐루야. 우리 조선일보, 성령 충만, 영빨 받았다.
또 하나의 희망은 “자유주의 486”이란다.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자유주의 486’ 또한 주사파 386의 약점과 정체를 누구보다도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그들의 천적이다. 80년대에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받들다가 한 번도 분명하게 전향을 선언한 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끗발을 잡더니 국보법 폐지에 앞장서고, 미국 의회의 북한 인권법 통과를 시비하는 그들….”
얼마 전에 이 곳에 올린 글에서, 왜 조선일보 같은 1등 신문에서 하필 서강대 모 교수처럼 기량 떨어지는 분을 억지로 띄워주려 하는지 의아해 한 바 있다. 이제 그 해답을 얻은 것 같다. 바로 이것이다. 서강대 신지호 교수야말로 “주사파 386”의 “천적”, 그들의 “약점과 정체를 누구보다도 환히 꿰뚫어보고 있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자유주의 486”이 아닌가. 아니, 이렇게 심오한 뜻이.
여기서 조선일보가 얼마나 현실감각을 상실했는지 알 수 있다. 현 상황을 인민군에 전 국토를 내준 상태로 보는 것은 피해망상이고, 교계에서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야무진 환상이며, 신모 교수 같은 수준의 분이 ‘전향’으로 “업그레이드” 했다고 386을 무찌를 실력이 된다고 믿는 것은 막연한 몽상이다. 그 유치한 망상과 환상과 몽상에 매트릭스에 속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그 매트릭스를 빈 집으로 놔둘 수는 없고, 그래서 아예 자기들이 그 안에 들어 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이 대한민국 21세기의 낙동강 전투에서 애국 기독교 세력과 자유주의 486은 이제 방어전 아닌 공격전으로 과감히 치고 나가야 한다. ‘민족민주’라는 방패막이 뒤에 숨어 있던 ‘위수김동’ 증후군이 알몸을 드러내도록, ‘80년대 그들’에 대한 진상규명부터 당장 시작해야 한다. 이 반격전에 “솥단지를 들고 시위하고 싶다”는 영세시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연결시킬 때 2004년 가을은 마침내 한편의 막판 뒤집기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전함 12척’은 분명히 남아 있다.”
제가 만든 환상에 제 스스로 빠져 거기서 혼자 비장해 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 각별한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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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제게 아직 낙동강 오리알 두 개가 남아 있사옵나이다.
부디 솥단지에 삶아 강호동 먹여
이 가을, 막판 뒤집기를 장식하소서.”
진중권 / 문화비평가
입력: 2004년 11월 03일 20:24:31 / 최종 편집: 2004년 11월 03일 21: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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