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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교수와 나

이름 : 강수돌 ( )

날짜 : 2003-12-26 오후 4:37:51

송두율교수와 나

송 선생님, 저는 요즘 선생님 생각에 밤잠을 설칩니다. 거의 ‘짝사랑’하는 마음으로 37년만에 고향을 찾은 당신이 정겨운 사랑방은커녕 1평짜리 시멘트 바닥에서 한편으론 좌절감과 무력감을, 다른 편으론 원망과 분노를 느끼고 계실 것을 생각하면 편히 쉬기가 죄스럽군요.

선생님, 그동안 얼마나 갑갑하셨습니까 첫 공판에서 선생님은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시간을 정말 오래 기다렸다”고 했지요. 또 수감 1주일만에 “없는 사실을 인정할 바에야 죽어서 사는 길을 택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진실을 풀어놓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당신은 이미 그간의 삶 속에서 진실을 다 풀어놓았지요. 오히려 당신은 그 진실 해명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척박한 한국 사회에 새 생명력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그것은 당신이, 법정에서조차 뚜렷이 드러난, 한국 사회의 ‘레드 컴플렉스’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 땅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항상 우리를 억누르며 자기검열까지 강요해온 저 ‘레드 컴플렉스’를 정면으로 넘어가려는 행렬에 당신이 앞장선 셈이지요. 저도 힘을 보태렵니다. 그리고 아마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첫 공판에서 말한 ‘에포케’()를 정말 지금부터라도 만들어가야 합니다.

당신이 수십 년간 고향 땅을 밟지 못하다가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왔을 때 막상 사람들은 당신을 ‘악마’ 취급하며 ‘추방’하라 했지요. 그런데 저 ‘수구’들이 당신을 ‘악마’ 취급하고 ‘추방’ 운운하는 것은 사실은 한국사회가 이미 40~50년 전에 겪은 ‘집단적 상흔’의 결과입니다. 각종 ‘사태’와 ‘전쟁’까지 겪으며 좌우가 충돌하고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생사의 엇갈림을 보고, 크게 상처 받은 한국사회는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반공주의에 기초한 경제개발’을 내걸었지요. 그래서 세속적 출세와 물질적 성공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고 그 대신 모든 인간적, 생명적 가치들을 ‘추방’했지요. 그런데 이제 반세기가 흐른 지금, 이미 오래 전 ‘두려움’에 떨며 애써 내쫓았던 그 소중한 가치들이 그들에겐 ‘악마’처럼 환생한 듯하니 얼마나 두렵겠어요 그러니 그들을 오히려 따뜻하게 감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잠을 못 이루는 건 저 수구들의 ‘레드 컴플렉스’ 때문만이 아닙니다. 바로 저 자신의 그것 때문입니다. 저는 그간 이룬 당신의 학문과 활동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면서도 당신이 수모를 겪고 고통을 당할 때, 마치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하고 있었지요. 비록 제가 공교롭게도 지난 8월부터 태평양 건너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지만 말입니다.

당신이 아픔을 겪는 그 시점에도 저는 여기서 ‘다른 생명의 고통을 함께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적 숫자와 논리로 학문을 한다고 폼을 잡는 것은 위선’이라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저는 당신의 번민과 아픔을 함께 느끼려 하지도 않고, 저 근거도 맥락도 없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고위관리”, “수만 달러 금품 수수” 등 신문 보도의 ‘사실’ 확인에만 신경을 곤두세웠지요.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도 제 안의 ‘레드 컴플렉스’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아마 평생을 걸고 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을 중심으로 마음과 힘을 합친다면 우리는 저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수구’들과 저 병들고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은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 ‘조국’과 ‘민족’이 우리를 억누르는 부분까지 슬기롭게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뜻에서 이미 당신은 더 이상 ‘경계인’이 아니라 ‘초월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의 싸움은 결코 당신 개인과 공안 검찰의 싸움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차원에서 진행되는,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의 싸움이지요.

선생님, 비록 재판정에서 ‘병든 것들의 서글픈 목소리’가 당신을 협박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움츠리지 마시고 ‘진실’ 속에서 ‘미소’와 ‘희망’으로 꿋꿋이 전진하십시오. 당신 말처럼 “죽어서 산다”는 각오로 힘을 합치면 우리는 진리와 정의의 건강한 빛을 꼭 되찾을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장관, 그리고 담당 판사님도 이를 잘 알 것입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강수돌/고려대 교수

한겨레 신문 2003. 12.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