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이란 무엇인가
이 름  황필호 날 짜  2002-11-21 오전 11:55:38 조회수  2725

내용

 직장이란 무엇인가
 
  우리 나라에서도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라서 직업의 서열이 결정되었
 다. 양반은 과거에 급제해서 관료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관료 중에서
 도 무관(武官)보다는 문관(文官)을 더욱 높게 여겼다. 여기에 비하여 상민은 농
 업, 공업, 상업에 종사했다. 그 중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이 잘 표현
 하듯이, 농업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농경 사회에서 이러한 관념
 은 당연한 것이었다. 양반과 상민 사이에는 중인(中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주
 로 하급 관직이나 기술직에 종사했다. 그들은 의관(醫官), 역관(譯官), 기상(氣
 象)을 보는 것 등과 같은 전문직이나 지방 관리직을 세습적으로 지탱하기도 했
 다. 그리고 상민도 종사하지 않는 백정(白丁), 관노(官奴), 사노(私奴)와 같은
 사람들은 천민으로 간주되었는데, 그들은 마치 인디아의 사성 계급(四姓階級)에
 도 속하지 않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산업 사회로 들어오면서 일과 사회적 신분의 관계는 전혀 다른 차원으
 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산업 사회에서는 일 자체가 종래 봉건 사회에서의 일
 과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첫째, 기계와 기술의 발달로 일이 반드시 힘든 육체 노동이 아닐 수도 있게 되
 었다. 힘든 일은 기계가 하며, 특히 1776년 와트(James Watt)가 발명한 증기기
 관은 인간의 힘든 노동이 없이도 수십 배의 섬유 생산을 하도록 만들었다.
 
  둘째, 일은 이제 무식하지만 힘이 있는 사람들이 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조작할 수 있는 특수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독점물이 되었다. 그래서 노동자
 들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아는 것이 힘”이라는 프랜시스 베
 이컨의 격언을 문자 그대로 믿게 되었다.
 
  셋째,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일의 종류와 자격 조건이 다양해지면서 지금까지 엄
 연히 존재해 왔던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의 간격이 좁아지게 되었다. 육체 노동
 을 하는 사람도 어느 정도는 머리를 쓰고 계산을 할 수 있어야 하게 되었고, 따
 라서 정신 노동이 특권층의 소유물이라는 관념도 희미하게 되었다.
 
  넷째, 산업 사회가 준 가장 커다란 변화는 모든 사람이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광장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일은 이제 신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
 니라 각자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산업화와 기계화는 이상과 같은 긍정적인 변혁과 동시에 일의 소외성이라
 는 부정적인 변혁도 몰고 왔다. 그리고 산업 사회라고 해서 직업이 사회적 지위
 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사회적 지위는 전통 사회에 있어서처럼 신분
 에 의하여 세습되는 귀속적(歸屬的) 지위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성
 취할 수 있는 획득적(獲得的) 지위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위의 계층화를
 반드시 부당한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달을 정복하고 국제화 시대를 외치는 우리 사회에
 는 아직도 봉건주의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우선 능력과 노력에 의하여 마
 음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산업 사회의 특성은 아직도 찾아볼 수 없다.
 집안이 가난한 사람은 절대로 성악가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수 없다. 일류 학
 교에 보낼 돈이 없고 공공연한 음성적 사교육비를 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
 다. 재벌의 아들은 당연히 계열 회사의 사장이 되고, 전직 장관들도 으레 일류
 기업의 사장이나 자문위원이 된다. 그야말로 사람 나고 돈 있는 것이 아니라 신
 분 있고, 빽 있고, 인연 있는 사람만이 출세를 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는 취업의 기회가 학연, 지연, 인연, 남녀에 따라서 차
 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직업이라도 정신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육체 노동을
 천시하는 봉건주의적 잔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아무리 다급해도 식모 노릇
 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대학생, 수입이 좋은 외판원보다는 겨우 교통비를 받
 는 사무실 근무를 선호하는 젊은이, 비록 커피를 나르는 사내 식모가 될지언정
 일반직보다는 사장 비서실에서 일해야 끝발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성. 이런 사람
 들이 우글대는 사회는 아직 산업 사회의 장점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이
 다.
 
  현대 산업 사회의 특징은 직업의 종류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결정되
 는 것이 아니라, 각 직업 내에 있어서의 ‘종사상의 지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같은 직장이라도 더욱 많은 소득을 받는 사람이 윗사람이 되는 것이
 다. 미국의 많은 대학 졸업생들이 시시한 회사의 화이트 칼라보다는 차라리 돈
 을 많이 주는 건축 현장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질적으로 모든 일은 동일한 것이다. 그리하여 생 시몽(Saint Simon, 1760~
 1825)은 모든 종류의 일이 다같이 귀중하고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아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특히 베네딕트 수도원은 언제나 수도자들에게 육체적인 일을 의무
 로 인정해 왔던 것이다.
 
 (황필호, <모든 생활은 철학이다>, 창해,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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