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은 아직도 꽃이 피지 않았다(2)
이 름  신 옥 날 짜  2000-07-27 오후 2:06:00 조회수  1142

내용

 금강산에 웬 군인?
 
  금강산으로 가는 도로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군인이 서 있었다. 경직된 표정, 새
 까맣고 추워서인지 붉게 부르튼 손, 작은 키, 후줄근한 군복을 입은 군인은 내
 눈에 스무살도 채 안되어 보였다. 우리 때문에 서 있다는 말에 미안하고 반가운
 마음에 지나칠 때마다 웃으며 열심히 손을 흔들었지만 날카로운 눈초리는 변함
 이 없었다.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지 우리가 그들을 구경하는지 알 수가 없었
 다. 하긴 군인이니 근무중에 손을 흔들 수도 웃을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 전방
 군인들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손을 안 흔드니 우리도 흔들지
 말자는 한 아주머니의 속 좁은 소리에 씁쓰레해졌다.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우리를 보고 저 군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했다. 부
 러워 할까? 우리가 '미제의 놀음에 억지로 온 여행을 위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
 한다고 들었는데 설마 그럴까? 우리의 표정과 옷차림, 아이들의 해맑은 미소를
 보고도 정말 그런 생각을 할까?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공산주의 사상이 투철한
 군인이라 하지만 그들도 생각이 있고 보고 느낀 것이 있을텐데....... 다만 표현
 하지 않는 것 뿐일 것 같았다.
 
  천 개의 불상이 서 있는 듯 해 천불암 같다는 산을 바라봤다. 우리의 산과는 많
 이 달랐다. 짙고 푸른 색이 아니라 흑갈색을 띤 나무만 보였다. 겨울이 채 끝나
 지 않아서 일까?
 
  오로지 금강산 관광을 위해 만들어진 도로 길 건너엔 북한주민이 다니는 도로
 가 따로 있었다.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사람들이 서너 명씩 걸어가고 있었다.
 차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우리가 가는 도로 바로 옆으로 철길이 길다랗게 놓여 있었다. 원산에서 양양까
 지 이어지던 동해 북부선이 끊긴 채 길게 드러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 철길위로
 학교를 가는지 보따리를 들고 소년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너무 반가워 손을 크
 게 흔들었다. 가까이 있어 얼굴까지 자세히 보이던 그 소년들도 환히 웃으며, 더
 러는 무표정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용하던 버스에선 모처럼의 반응에 기쁜
 나머지 일순간 소란스러웠다.
 
  얼마쯤 가니 왼쪽으로 성전리 마을이 나타났다. 성전리 마을은 2년 전 금강산
 도로를 만들면서 함께 지어진 집들이라 했다. 도무지 색깔이 없었다. 회색칠을
 한건지 시멘트 그 자체인지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탓에 명확한 구분이 되질 않았
 다. 산골의 평화로움은 보이지 않고 척박함이, 쓸쓸함도 아닌 암울함이 느껴졌
 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소 닭.개들이 간간이 눈에 띠였다.
 
  오른쪽에 있는 온정리 마을 쪽으로 가니 소를 끌고 쟁기질 하는 모습,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땅을 일구는 주민을 볼 수 있었다. 남루한 옷에 추워서인지 대부
 분 머플러로 목을 감싸고 있었다. 흙조차 황토색이 아닌 흑갈색이어서 더욱 황폐
 하고 척박해 보였다
 
  10여분 후에 도착한 곳은 온정각 휴게소였다. 조금 전 봤던 북한 건물과는 확연
 히 다른 최신식 예술성이 가미된 건물이었다. 역시 현대측에서 지은 건물이었
 다. 버스에서 내리니 맨 먼저 '천하제일명산 금강산' 이란 푯말이 눈에 확 들어
 왔다. 사진촬영이 허용되는 첫 장소여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고개를 들어 오른쪽을 보니 산속에 어울리지 않는 12층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금강산 여관이었다. 예전엔 김정숙 휴양소로 북한 최고 지도자 부인이 쉬었다는
 곳인데 오래 되어서인지 허술했다. 하긴 그 시절에 지은 건물로 치면 최고의 건
 물이라 할만 했다. 지금은 당간부가 가족과 함께 휴가 오는 곳으로 변했다 한
 다.
 
  다시 버스에 올라 금강산여관을 지나 구룡폭포 코스로 향했다. 여러 종류의 나
 무가 들어선 우리 산과는 달리 미송.황송.적송 등의 키가 큰 소나무와 참나무가
 대부분 이었다.
 
  늘씬한 나무들을 무심히 보고 있는데 사람인 듯 허수아비인 듯한 물체를 지나
 친 듯 했다. 순간 놀람과 함께 이 산속에 정말 군인이었을까? 의구심이 솟아 창
 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에 똑 같은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났다. 깊은
 산속 일정한 간격으로 18-9세로 보이는 군인들이 우리를 향한 채 혼자서 차렷자
 세로 서 있었다. 단지 버스만이 지나가는 깊은 산속인데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
 는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계속 지나치다보니 여행의 즐거움은 낮게 깔리고 비
 애가 감돌았다. 분단의 아픔은 이렇게 곳곳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좋은 버스에 편하게 앉아 가고있는데 깊은 산 속 차가움이 아직 남아있
 는 4월초의 추위와 풀풀 날리는 먼지 속에 군인들은 서있었다. 버스 뒷 꽁무니
 에 남아있는 뿌연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서 있는 키가 작아 어린 소년처럼 보이
 는 군인들의 모습이 안타까움으로 내 가슴을 짓눌렀다.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할
 까? 이왕 군인을 세워 놓으려면 덜 춥고 지루하지 않게 2명씩 보초를 서게 했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냥 손이래도 열심히 흔들어야 될 것 같아 계속 손을 흔
 들었다. 그 손엔 애잔함의 무게로 손놀림이 차츰 무거워졌다. 군인들을 지나친
 후에도 고개는 한없이 뒤로 젖혀졌다.
 
  금강산 4대 사찰인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
 대사가 승군을 조직한 유서 깊은 신계사를 설명해줬다. 알 낳을 철이 되면 연어
 가 많이 올라와 사람들이 몰려들자 살생을 금지하기 위해 주지가 용왕에게 연어
 가 못 올라오게 요청을 한 뒤론 신계천에는 연어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전설이었
 다.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됐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어 지금은 3층 석탑만 남아
 있다고 하나 버스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50여 년 만에 드디어 드러난 금강산
 
  주차장에 내려 조별로 구룡폭포와 상팔담을 향해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다섯
 신선이 놀았다는 오선암을 시작으로 첫 번째 다리를 건너자 목련관이란 식당이
 나왔다. 회색 건물뿐이었는데 목련관은 모처럼 붉은 색이 있었고 지금은 사용하
 지 않는다고 했다.
 
  산길을 굽어 돌아서니 생각지도 않았던 북측 안내원이 김일성이 다녀갔다는 돌
 로 만든 잘 꾸며진 비석앞에 서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자유롭게 가다가도 곳곳
 에 둘씩 서 있는 남녀 북측 안내원을 보면 순간 경직되기도 했다. 안내원이라기
 보다는 감시원이란 표현이 옳을 듯 싶었다.
 
  남자 안내원은 남색이나 보라색 점퍼와 검정 바지 차림이었고 밑바닥이 얕고 밋
 밋한 운동화를 신었다. 여자 안내원은 거의 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다. 앞머
 리를 옆으로 내리고 단발길이의 퍼머머리와 옷도 남자 안내원과 같은 점퍼 차림
 이거나 색깔이 좀 더 다양한 반 코트를 입고 있었다.
 
  화장법이나 립스틱 색상도 비슷했지만 대부분 예뻤다. 약간 둥근 얼굴에 쌍커
 플 코도 오똑했고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는 보통체형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래
 도 교육을 많이 받은 열성 당원이며 주민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일텐데도 행
 색은 초라해 보였다. 옷감재질이나 모양면에선 훨씬 뒤떨어짐을 알 수 있었다.
 우린 그들의 신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 등산화와 메이커신발, 울긋불긋 다양
 한 점퍼들, 카메라와 비디오를 들고있는 우리 모습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서는 안되지만 우리가 부탁하면 사진을 친절하게
 찍어주었다. 처음의 조바심을 걷고 조금씩 서로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수고하십
 니다 등으로 시작되어 웃으며 제법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조장과 북측 안내원끼리는 이제 농담도 자주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고 한
 다. 우리 조장이 유행하는 앞이 긴 큰 신발을 신고 있자 아버지 것 물려 신었느
 냐며 자기가 한 켤레 사주겠다고 했단다. 50달러 정도 된다고 하니 운동화가 그
 렇게 비싸니 다른 것은 어떻게 사서 쓰느냐고 안타까워 하드란다. 깜짝 놀라워하
 는 안내원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산길을 한없이 걷다보면 반드시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 보게 된다는 앙지대
 를 만나게 된다. 구령연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에 있는 비스듬한 너럭바위, 사방
 이 절벽으로 막혀 있고 위로 하늘만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산 속에 갑자
 기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원래 길이 없었는데 대홍수가 나면서 문이 생겨 구령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는 금강문이 보였다. 금강산에는 여덟개의 문이 있는데 이 금강문을 외금강문이
 라 한다. 굴벽 왼쪽에 금강문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다. 집채같은 큰 바위
 들이 겹쳐 있는 가운데 기역자 모양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데 돌 계단을 밟고 올
 라가니 빠져 나가게 되어있었다.
 
  금강산은 원래 따뜻한 곳이면서도 눈이나 비가 자주 온다고 했다. 햇살은 따스
 하게 비추었지만 바람은 차가웠다. 나이드신 분들이 최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까 싶었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젊은이 못지 않았다.
 
  수정같은 물이 옥구슬처럼 흘러내려 옥류동이라 한 골짜기는 금강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 꼽힌다. 봉우리와 계곡.바위.물.나무.화초들이 철 따라 절
 묘하게 어울려 아름다운 한 개의 예술품과 같아 신라의 최치원 시인과 조선시대
 의 정선을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절승을 노래하고 그림을 그린 곳이기도 하
 다. 설악산의 십이선녀탕 계곡과 느낌이 비슷했다.
 
  시간 제한 때문에 충분히 감상하고 느낄 여유가 없었다. 마치 쫓기는 듯한 심정
 으로 대충 쳐다보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능한 내려올 때 사진도 찍고 감상하라
 고 했다. 그걸 다 기억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낯선 곳 대치상태의 알 수 없는 땅
 이라 개인적인 행동은 자제해야 했다. 바람이 세차 감기에 걸린 난 콧물과 함께
 산을 올랐다.
 
  선녀들이 흘리고 갔다는 두 알의 구슬이 오색 물줄기로 이어졌다는, 물 빛이 아
 름답기로 소문난 연주담이 눈 앞에 나타났다. 물 빛이 초록색으로 참 깨끗하여
 정말 에메랄드 보석처럼 보였다. 거기서 올려다 보는 바위들은 보는 사람에 따
 라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독서하는 모습이기도 했고 화장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기를 달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금강산 4대 폭포 중 하나인 비봉폭포에 다다랐다. 절벽을 타고 흐르는 물이 마
 치 봉황새가 억센 날개를 펴고 꼬리를 휘저으며 날아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었
 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구룡폭포가 눈앞에 보였다. 구룡각이라는 누각에 올라서니
 우리나라 3대 폭포인 대승.박연폭포와 함께 높이 74m, 너비 4m, 길이 84m가 되
 는 구룡폭포가 거대한 장관을 드러냈다. 웅대하고 장엄한 기세로 폭포는 아래로
 흰 물줄기를 내 쏟으며 힘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 밑에 절구통처럼 생긴 못은 구룡연으로 물 깊이가 13m나 된다. 이 폭포의 물
 은 12km나 되는 비로봉에서 출발하여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쳐 흐르다가 상팔담
 의 여덟 못을 거쳐 폭포로 떨어진다고 한다. 비단이 드리운 듯 물안개를 일으키
 며 떨어지는 힘찬 물 기둥이 무지개 빛을 내품고 있었다.
 
  아홉 마리 용이 유점사의 53불과 싸우다 패해 여덟 마리 용은 상팔담에, 한 마
 리 용은 구룡연에 숨었다는 전설처럼 거대한 용 트림을 하고 그 물 속 깊은 곳에
 서 나옴직도 했다. 구룡폭포옆에는 '미륵불'이란 큰 글자가 써있는데 폭포의 기
 세에도 꺽이지 않는 듯 보이는 것은 왤까?
 
  구룡폭포에서 내려와 왼 쪽으로 올라가면 상팔담이다.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발
 생지로써 팔선녀의 목욕터였다는 녹색빛을 띤 여덟 개의 연못이 산을 에워싸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왕복 30분이 넘게 걸린다기에 포기하
 고 말았다. 화장실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내겐 무리였다.
 
  포기하고 상팔담 입구에서 쉬려고 고개들어보니 커다란 바위에 '위대하신 김일
 성 수령님...' 이라고 바위크기와 비례로 글씨도 크게 써 있었다. 아름다운 금강
 산 곳곳에 특히 절경이라는 곳엔 반드시 비석이 세워지거나 바위자체에 김일성
 찬양 글귀가 꼭 씌여있었다. 관광객은 자연을 보호하고 북한 당국은 훼손하고 있
 는 셈이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하자 남편이 화를 내며 주의를 줬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화가 났다.
 
  조장은 자세히 이곳저곳 설명을 해주었지만 어딘지 몰라 그냥 스쳐버린 곳이 많
 았다. 대부분 화강암 바위들로 여러 형체의 모습이 침식.풍화작용으로 자연스럽
 게 만들어졌다. 그냥 볼 땐 잘 모르겠는데 조장의 설명을 듣고 나면 그럴 듯 했
 다.
 
  날아가던 매가 방금 앉아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살펴보는 것 같은 매바위 산과
 양곡과 물자들을 수레로 운반했다고 하는 술기넘이 고개도 있었다. 술기넘이는
 북한말로 수레라는 뜻이라 했다.
 
  오른 쪽에 산삼과 녹용이 녹아 흐르는 물이라는 삼록수에서 물 한 모금을 꿀꺽
 꿀꺽 마셨다. 김일성이 친히 삼록수라 지어주었다는 글이 역시 바위에 새겨져 있
 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십년은 젊어진다는 말이 아니래도 아까 오를 때는 화
 장실 때문에 마시지 못했는데 하산길이라 걱정없이 마셨다. 물 맛은 그야말로 사
 막에서의 오아시스였다.
 
  일부러 챙겨 온 물병마다 가득 물을 담느라 바쁜 사람들을 보고 이 곳까지 와
 서 저래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이 있는 땅이기에 나름
 대로 물을 저렇게 많이 가지고 가야하는 사연이 있으리라 여겨졌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갈수록 머리가 너무 아팠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간식으
 로 준 오이와 찰떡을 먹으며 산을 내려왔다. 산을 오르면서 자세히 살펴보아도
 설악산에서 보았던 다람쥐도, 새 한 마리도, 꽃 한 송이도 그 흔한 민들레 조차
 도 보지 못했다. 단지 개동백이란 노란 꽃 나무만 그것도 간간이 볼 수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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