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기념일 챙기기
이 름  김혜주 날 짜  2000-04-11 오후 8:55:24 조회수  849

내용

 김혜주(주부, 부천 상동 신라아파트)
 
  나는 기념일이나 생일에 무심하다. 내 것이건 남의 것이건 크게 관심 두지 않는
 다. 그래서 다른 아줌마들이 남편이 생일을 잊었네, 결혼기념일을 안 챙기네 불
 평을 하면 그게 그렇게 서운한가 잘 이해가 안 간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더니 어렸을 때부터 무슨 날이라고 별로 챙기고 즐거워해 본 적이 없어서
 일까.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오랜 병환으로 집안 분위기는 늘 무거웠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는 별 것 아닌 일에도 짜증이 많으셨다. 모처럼 무슨 날이라고 좀 즐거워
 하자면, 어느 틈에 심기가 불편해진 아버지가 버럭 고함을 지르시고, 우리는 모
 두 더 우울해져 버리는 것이었다.
 
  소풍날이나 명절이 되면 그 떠들썩한 분위기가 아버지를 자극할까 봐, 늘 아버
 지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불안한 한 두 시간이 지나면 거의 예외 없이 그 살
 얼음 같은 즐거움도 끝이 나 버리는 것이다. 부모님께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
 아본 기억도 없고, 생일이라고 선물을 받아 본 기억도 별로 없다.
 
  다 자란 후에는 어느덧 그런 분위기에 젖어버렸는지, 누가 생일을 챙겨주지 않
 아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가 생일을 챙겨주면, 그 친구의 생일도 놓치
 지 않고 챙겨야 한다는 사실에 약간의 부담을 느낄 만큼이 됐다.
 
  연애하고 결혼한 후에도 남편에게 기념일에 대한 부담은 전혀 주지 않았다. 간
 혹 남편이 잊을라치면 서운한 척하였지만 진짜 서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재미있는 것만은 아닐진대,
 그 무료한 일상에 가끔씩 '무슨무슨 날'이라고 색깔도 입히고 유난도 떨어보는
 것이 무어 나쁠까. 아이들 생일이라고 풍선 수십 개 불어서 여기 저기 장식하
 고, 아이들에게 흰 드레스를 입히고, 동네 아이들에 그 엄마들까지 다 불러서 잔
 치 벌여주는 옆집 아줌마를 보면서 여러 가지 반성을 했다.
 
  내 아이들에게는 그런 추억을 남겨 줘야지. 어느 크리스마스, 어느 해 설날,
 몇 살 때 생일날 있었던 갖가지 즐거움을 두고두고 회상하게 해 줘야지.
  아직도 기념일, 생일 챙기기에 익숙하지 않아서 깜빡 깜빡 잊는 적도 많지만,
 요즘은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즐기려고 많이 노력한다. 몇 년 더 지나면 나도 남
 편이 결혼기념일을 그냥 넘겼다고 섭섭해하는 그런 아줌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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